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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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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작품이 정말 좋다. 진짜 좋다. 완전 좋다.

형제 감독의 영화...<아들> <로제타> <차일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로나의 침묵>도 그랬다. 로나가 울면, 나도 울었다. 이렇게 고요한 눈물을 흘린 경험, 오랜만이었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 속 여성들은 참 말이 없다.

그들은 그저 종종 걸음으로 거리를 혼자 걸어가거나 무심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거나 할 뿐이다.

그런데 그녀들의 눈에서 수많은 고독을 읽어낼 수 있다.

험난한 세상에서 혼자 발버둥치며 살아내야 하는 여성들의 스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로제타를 보며 가슴을 쥐어 뜯었듯 로나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로나나 로제타를 그저 '여성'의 의미로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로 존재하다.

다르덴 형제의 '그저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내가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좌빨 포스' 때문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인 이 세상에서 돈에 찌들어 살면서도 다른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빈곤층의 모습을 담아 내는 좌빨 포스.

다르덴 형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저 보여주는 것만 할 뿐 가치 판단은 우리에게 돌리는 좀 더 거리를 두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고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뒷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찌르는 것이어서

우리는 대체 이 불평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고 싶어진다...

다르덴 형제는 마치 <4월 이야기>에서 사랑이 시작될 찰나에 영화를 끝내 버리는

이와이 슌지 감독처럼 아주 절묘한 순간에 영화를 끝내 버린다.

다음 이야기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하는 식이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지 않고 우리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로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로나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

바로 영화가 끝난 지점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영화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완성한다.
1시간 40분 동안 전혀 지루함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나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특별한 스토리는 없다.

로나는 알바니아에서 벨기에로 들어와 위장 결혼을 한 여성인데 그녀의 법적인 남편은 마약 중독자 끌로디다.

끌로디는 로나에 대한 감정 때문에 어떻게든 마약을 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로나는 돈을 위해 그와 이혼을 하고 남자친구와 작은 가게를 열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있다.

로나를 이용해 위장 결혼을 시킨 뒤 수수료를 받아 내는 남자들은 그녀에게 마약 과다 복용으로 끌로디가 죽을 때까지

이혼을 미루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로나는 끌로디와 이혼을 하고 돈을 받아 내고 싶지만 그가 죽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혼을 요구하는 로나때문에 다시 약을 시작하려는 끌로디와 약을 못 사게 막으려는 로나...

두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서로를 사랑(or연민)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것이 사랑일까? 그러나 로나가 느낀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비상구가 없던 로제타의 삶에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역시 그녀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 안에 있는 청년 아니었던가.

로나가 끌로디를 알몸으로 끌어 안았을 때의 감정은 단순히 욕망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불행이나 끌로디의 중독이 개인적인 것이냐

사회적인 것이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고 말한다.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가면을 벗고 다가와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배신하기 마련이나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삶의 배신조차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만일 다르덴 형제가 인간의 힘을 긍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영화는 정말 숨막혔을 것이다.

끌로디의 자전거를 쫓아가며 장난치는 로나의 얼굴 측면 클로즈업이 지나가면

짐을 싸는 로나의 얼굴 측면 클로즈업이 다시 시작된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다음에 나오는 대사나 상황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르덴 형제는 여전히 다큐 화면처럼 과감히 스토리를 편집해버리고

감정 과잉이 될 수 있는 모든 극적 상황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내 생각엔 좌파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감독들이다...

그들의 영화는 본질적인 면들이 인간적인 것이기에 투쟁적이지 않은 카메라를 가지고서도

충분히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로나는 임신을 한 것일까, 아닐까.

그 문제 역시 로나의 감정이 사랑인가 연민인가 하는 문제처러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로나의 환상이건 현실이건 로나가 '내일 다시 시작할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

'이제 쉬어'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저 그 끈을 놓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끈 하나면

이 지독한 삶을 꾸역 꾸역 살아내면서 슬쩍 웃을 수도 있고 사랑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성과 연결시키지 않아도 될 법한 설정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더 차일드>의 아버지가 부정 때문에 아들을 찾으려 했다는 결론처럼 지나치게

영화를 한정시키는 우려를 범할 수 있는 거니깐.

나는 차라리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이 끝까지 독하고 나빴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마음이 이리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나는 그저 끌로디에게 속죄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거, 참 다르덴 형제스럽지 않나.

그 사실이 마음 아프다면, 내일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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